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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안에서

by 해들임 2009. 3. 1.

 

전철 안에서



하루가 다르게 산빛이 치오르는 요즘, 유감스럽게도 나는 감기를 붙들어 목이 살얼음처럼 예민해졌다. 공기의 미세한 변화에도 목구멍이 금세 까탈을 부린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시간인데 전철 안은 벌써 울창한 숲이다. 머리 위에 매달린 손잡이를 붙들고 눈을 감은 채 흐느적거리며 몇 정거장을 지나자 다행히 빈자리 하나가 생긴다. 승객이 자리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나는 좌우 둘러볼 여유 없이 궁둥이를 털썩 내려놓고 단내를 풍기며 눈을 감았다.

옆자리에는 젊은 여자가 앉은 모양이다. 도발적인 화장품 냄새가 목구멍을 간질거려 기침이 다시 매 끓어오른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다고 하지만은 바로 옆자리 승객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터여서 자신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다. 한번 탄력받은 기침은 내리막길을 달리는 굴렁쇠다. 굴렁대를 이미 떠나 저 혼자 곤두박질치던 굴렁쇠가 차츰 멈추어선 것은 옆자리 여인의 뜻하지 않은 선심 때문이었다. 기침으로 자지러지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목 캔디 하나를 건네주며 자신도 감기가 걸려 기침이 잦다는 말을 덧붙인다. 상대가 여자인지라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렴히 캔디를 입에 넣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인후(咽喉)로 피어오르던 메케한 연기가 캔디 향 속으로 스르르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전혀 낯선 여인의 친절은 가슴을 설레게도 한다. 나이가 얼마쯤 돼 보이는 여인인지 궁금했으나 일부러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그녀 앞에 가방 든 승객이 섰는지 그것을 받아주겠다는 말이 들린다. 선반이 있다 한들 사람이 받아주는 것보다 인정스럽고 듬직하랴. 그녀의 행동거지나 마음 씀씀이가 전혀 도회지 풍이 아니어서 몇십 년 전의 차를 타는 기분이다. 어른들에게 주저 없이 자리를 양보하거나 무거운 짐도 마다치 않고 받아주던 그때가 아니던가.

언제부턴가 도시의 시선은 위아래 수직으로만 흐른다. 주위를 살펴볼 겨를 없이 자신의 머리에서 발끝까지로 시야를 좁히는 일상이 잦은 것이다. 수평적 시야가 사라져 마음마저 좁혀지다 보니 조그만 친절에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경계를 하거나, 곁을 좀 내어달라 부탁하면 쉬 짜증을 내기 십상이다. 여전히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순수한 행동거지에서 신선함을 느낀다. 전철 안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가, 몹시 건조한 날 숲에서 불어오는 눅눅한 바람 같다.

종종 고향을 내려갈 때 버스를 타보면 아직 수평적인 시골 사람들을 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아랫장에 갔다 온갑소 잉, 뭣 쫌 났습디여?”, “그 무건 것을 어치케 이고 왔다요, 솔찬히 무겁겄구마.”하며 안부를 묻거나, 누군가 무거운 짐을 실으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실어준다. 젊은 사람들, 비록 중고등학생일지라도 어른이 오르면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그래서 그곳에 내려가면 가만 앉아 있는 나조차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운 좋은 날에는 퇴근길 전철에서 더러 앉아오기도 한다. 그 운 좋은 어느 날, 내 옆에는 스무 살 남짓의 여자애가 앉았고 그 옆에는 오십 중반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여자애가 한창 수마(睡魔)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지는 머리가 중년 여인의 어깨를 누를 때마다, 그녀는 짜증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여자 아이 머리를 슬며시 밀쳐내곤 하였다. 좀처럼 깨어나지 않은 여자 애는 내 어깨로 기대라 하면 군말 없이 기댈 듯 지쳐 보였다. 그런 아이가 내 쪽으로 쓰러져도 괜찮을 텐데 한사코 중년여인에게 쓰러졌다. 어찌나 안쓰럽던지 내 어깨나 팔을 빌려주어 편히 자도록 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무슨 오해나 봉변 받을지 모를 요즘이다. 중년여인이 내리자 이번에는 젊은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여자 애 바싹 다가앉는 눈치가 술 취한 사람이나 졸고 있는 여자 곁을 일부러 찾아 앉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내릴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두면 종착역까지 갈 게 뻔해, 전철이 소사역에 정차할 무렵 나는 여자 애를 좀 세다 싶게 툭 밀치며 일어섰다. 그제야 여자 애는 미안하다는 내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어두운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나 역시 도시의 수직적 시선으로 그때 괜한 의심을 하였을지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캔디를 건네준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궁금하던 그녀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겨우 30대 초반쯤으로 마냥 수련해 보이는 그녀였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가 어디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 것일까.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군상 사이에서 기침을 하는 사람에게 목캔디를 건네고 아직도 짐을 받아 무릎 위에 올려주는 젊은 여자라니…. 빙그레 웃는 그녀 곁에서, 그녀의 어깨를 기댄 채 편안히 잠든 일전의 그 여자 애 모습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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