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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드림 추천도서

이순신이 '전선 12척'을 말한 진짜 이유

by 해들임 2023. 6. 22.

㈜한화방산 PGM연구소 책임연구원 국정호

[세종과 이순신, K 리더십] 저자

 

이순신 스스로 수군을 재건하라는 통제사 재임명 교서

 

정유년(1597) 7월 16일, 원균의 칠천량해전 참패는 조선을 다시 ‘태풍급 혼돈’ 속으로 몰고 갔다. 7월 23일 조정에서 병조판서 이항복이, “지금의 계책은 오직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여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한다. 이순신이 재임명의 교서를 실제로 받은 것은 10일이 경과한 8월 초3일이었다. 선조의 솔직한 사과문이라 할 수 있는 ‘재임명 교서(기복수직교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임금은 이같이 이르노라. 아아! 나라가 의지하고 든든함으로 삼는 바는 오직 수군뿐이었노라. 그런데 하늘이 아직도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으니, 흉악한 칼날이 다시 성하여 마침내 삼도의 군사를 한 번 싸운데서 모두 잃었으니 이후로 바다 가까운 고을들을 누가 다시 막아 낼 것인가? 한산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하건대, 그대(이순신)는 일찍이 수사 책임을 맡았던 그날부터 이름이 드러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로는 업적이 크게 떨쳐서, 변방 군사들이 장성(長城)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사람의 생각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래서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각별히 어둠에서 그대를 일으키고,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모친의 상중) 다시 천거하여 겸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노니, 그대는 지금 나아가 군사를 모아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要害地)를 지켜 군성을 일시에 떨치면 이미 흩어진 백성의 마음을 다시 편안케 할 수 있고, 적 또한 우리가 준비가 있음을 듣고 감히 다시 방자하게 창궐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이를 힘쓸지어다(이충무공전서, 교유(敎諭)).”

 

위에는 재임명 교서만 있을 뿐이지, 수군 전력을 어떻게 규합하고 재정비하여 언제부터 사변에 대비하라는 등의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백의종군 신분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에게 말했듯이, 직접 해안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할 수밖에 없는 극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결국 뼈아픈 반성을 한 선조가 내린 통제사 재임명 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내린 극단적 처방, “이순신 스스로 다시 수군을 재건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전쟁 상황에서 통수권자의 혼돈

 

한편, 칠천량해전 이후 일본군의 침략(侵略)을 살펴보면,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거의 궤멸되었다고 보고, 수군을 육군에 합류시켜 진주-남원-전주를 차례로 공략하는데 참여케 한다. 그러던 중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경기·수도권 진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9월 7일, 천안의 직산에서 조명연합군과 일대 혈전을 벌인다. 이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의 기세는 한풀 꺾이게 되고, 일본군은 더 이상의 북상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후 일본 지휘부는 전주회의에서 왜의 수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 진도(珍島) 이서의 전라도 서남 연해지역을 공략하는데 활용하기로 한다. 9월 초 남원에서 하동으로 돌아온 왜 수군 7천여 명은 조선 수군의 위치를 파악하며, 때로는 기습을 서슴없이 가하면서 점차 조선 수군을 겨냥한다. 그들은 다시 뱃길을 따라 서진하여 수도 한양으로 점차 북상하여 서서히 조선을 압박할 심산이다.

 

한편, 정유년(1597) 8월 현재, 다급해진 이순신 또한 칠천량의 비보를 듣고 진주-순천-보성으로 ‘남해대장정’을 돌면서 수군 재건을 위해 흩어진 동지들을 수습하고, 직접 적정을 정탐하는 중이다. 정유년(1597) 음력 8월 15일 추석날에 8월 7일 자의 유지(諭旨)가 도착한다.

정유년 8월 15일,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난 뒤에 (보성) 열선루(列仙樓) 위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님의 분부(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류성룡)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시 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전라도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말 네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저녁나절엔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거치면서 보성 열선루에서 밝은 한가위 보름달을 쳐다보며 소회에 젖었으리라. 칠천량에서의 대패로 깊은 수렁에 빠진 이 시기에,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임명하면서 수군 재건을 맡겼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 전력이 약해 해상에서 버틸 수 없으면 육지로 올라와 육전을 도와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다(이충무공전서, 권9. 부록1, <행록>, 정유년 9월).

 

사실상의 패잔병들과 빼돌린 전선 12척만 덩그러니 남겨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바다를 버리라는 잔혹한 명령을 돌려 말한 것이다. 허울뿐인 통제사 재임명에 이어 이번에는 바다를 버리고 육전을 도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적들은 일시적으로 육전에 참전하고 있지만, 이미 제해권을 장악하여 경상도 연해지방은 이미 왜적들의 안방이 되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바다를 통해 서진하여 올라가 조선 조정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임금의 분부는 육전에 합류해도 좋다는 것이다. 선조와 조정의 전략적 지혜가 아쉽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이순신의 심회가 편치 않다. 그래서 술을 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셔 잠까지 제대로 설쳤다.

 

해전은 늘 배수진이고 장수리더십의 시험대이다

 

이같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평소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유명한 장계,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를 써 올리게 된다. 이 날짜가 위에 보이는 8월 15일 추석 한가위였다. 민족의 명절인 이날은 그 어느 때보다 처참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수군 정비 노력을 보성에서 마무리한 이순신은 차분하고 신속하게 장계를 써 올린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호서를 직접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수군이 왜 수군의 진공로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곧 왜적이 바라는 것이며, 왜 수군은 거침없이 호남, 호서 연해를 거쳐 서울의 한강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설령 전선의 수가 적다고는 하나, 미력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왜적이 감히 우리를 얕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패기에 찬 말인가! 이는 절대로 해전, 바다에서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순신의 의지였다. 그리고 <장계>의 끝자락, “미력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왜적이 감히 우리를 얕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자기 확신인가! 왜적들이 이순신 자신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음을, 이순신은 스스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순신이 생각하기에, 조선 사람들은 10명 가운데 8~9명이 겁쟁이이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는 육전에서는 싸움에 임하여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해전은 배 자체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배수진(背水陣)이다. 따라서 장수가 잘만 지도하면 겁쟁이 병사들도 정예 병사처럼 싸우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전의 장점이다.

 

또 우리 수군의 판옥선과 화포는 왜적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 승조원들의 적개심과 사기를 끌어 올리고, 이것이 곧 시너지를 일으키면 임진년의 한산대첩을 다시 재현할 수도 있다는 게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이순신은 바다 위의 수군이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육전에 붙으라는 임금의 분부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답한 것이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미력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왜적이 감히 우리를 얕보지는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