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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의 몰입

by 해들임 2023. 6. 22.

㈜한화방산 PGM연구소 책임연구원 국정호

[세종과 이순신, K 리더십] 저자​

점차 한계에 다다른 이순신의 몸 상태

 

난중일기 속 정유년(1597)의 늦여름, 이순신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적에 대한 정보들은 점점 더 위급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민심은 왜군이 온다는 헛소문 등으로 크게 흉흉하였다. 이 과정 중에 이순신의 몸도 점점 한계에 다다른다. 그 무렵의 <난중일기> 한 대목이다.

 

정유년 8월 20일 [양력 9월 30일], 맑다.

앞 포구가 몹시 좁아서 진을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이순신은 배에서 군사들과 같이 숙식한다.) (배 안의) 창고로 내려가니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않고 앓았다.

 

8월 21일, 맑다.

(배 안에서) 날이 채 새기 전에 도와리가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한참 동안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할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을 앉아서 새웠다.

 

8월 22일, 맑다.

(배 안에서) 도와리가 점점 심하여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위염, 위궤양 증세가 심하였다. 그래서 온백원을 자주 처방받아 먹었는데, 심한 스트레스성 위염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

 

8월 23일, 맑다.

(배 안에서) 병세가 무척 심해져서 정박하여 배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배 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서 (뭍에서) 잤다.

 

8월 24일, 맑다.

아침에 도괘땅(도괘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낮에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 위(배 안)에서 잤다.

 

8월 25일, 맑다.

그대로 어란포에 머물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당포의 보자기[鮑作, 해산물 체취 담당]가 들에 놓아둔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왔다. 적이 쳐들어왔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배 안에서 잤다.)

 

8월 26일,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에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임준영이 말을 타고 와서 급히 보고하는데, “적선이 이진에 이르렀다”고 했다. 전라우수사(김억추)가 왔다. 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꼬락서니가 놀랍다. (그래도 전력에 도움이 되는 배를 한 척 끌고 왔다. 배 안에서 잤다.)

이순신은 정유년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 동안에 6일을 부하들과 함께 배 안에서 기거하면서 또 적정을 살피며 전선의 정박지를 점점 더 서쪽으로 이동시킨다. 이순신은 신경 쓸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의 몸은 신경성 위염의 증상을 보이며, 약으로 달래보고 또 술로 달래보지만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정도로 힘이 들었다.

 

이순신도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고까지 일기에 쓰고 있으니, 이순신이 받는 스트레스와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선상의 장병들도 같이 침식하는 통제사 이순신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정말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순신은 ‘남해대장정’을 통하여 그나마 120여 명의 전투 경험자들을 확보하였지만, 주어진 군비(軍備)의 현실은 너무나도 한심하였다. 이래서야 한차례 싸움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점세가 가져온 소 5마리의 효과

 

정유년 9월 1일,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15일 전,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회령포, 어란포를 거쳐 진도 벽파진에 정박하고 있었다. 왜적의 무리들이 야금야금 바닷길을 따라 서진함에 따라 이순신은 왜적과의 거리를 두고 점점 서쪽으로 전력을 물리면서 왜적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이때 제주도에서 ‘점세(占世)라는 사람이 소 5마리를 싣고 와서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갑자기 이게 왠 말인가? 점세는 누구이고 제주도에서 왜? 지금도 귀한 제주 소 5마리를 누가 보냈단 말인가? 여하튼 이순신은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세시 명절의 하나로 국화주 등 계절 음식을 준비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냄)’ 명절에 제주 소 5마리를 잡아서 군사들에게 먹인다. 비록 전시 상황이지만 최고 지휘관의 입장에서 보면, 9월 9일 이날은 중양절 명절이라 대원들에게 음식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토붕와해, 누란지위, 일촉즉발의 극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군사들에게 ‘최후의 만찬’이 될지도 모르는 제주 소 5마리를 잡아 먹임으로써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도록 영양을 공급하였다.

 

나는 제주목사 이경록이 보낸 위문품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1596년) 이순신이 무과 동기생인 북방 전우 이경록의 제주목사 부임을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던 일이 있었다.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는 소식과 토붕와해의 전장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제주목사 이경록이 멀리서나마 동기생 이순신과 열악한 조선 수군을 응원하는 ‘소 5마리의 정성’을 답례로 보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순신과 이경록은 10년 전 녹둔도 사건(1587년)에서 책임을 함께 지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이자 1576년 식년 무과 동기생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점세가 가져온 소 5마리의 정성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이순신과 수군 장병들의 가슴에 훈훈하게 전달되었다.

 

이순신의 몰입, 다시 잘 해낼 수 있을까?

 

한편, 명량해전 불과 한 달여 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은 13척에 불과한 전선을 이끌고 한바탕 승전의 쾌감에 휩싸인 일본 수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을 물리칠 방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데 이순신 앞에는 거침없이 물살이 소용돌이치며 우는 울돌목에, 왜적들이 무서워하던 거북선도 분멸되었고, 이제 남은 판옥선은 10여 척뿐이며, 그 판옥선 안에는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는 군사들 뿐이었다. 게다가 저 멀리엔 왜구들의 도륙(屠戮)을 피해 바다로 나온 피란선(避亂船)들이 즐비하였다. 이것은 흡사 사자 앞에 얼룩말 형국이다. 얼룩말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위기 속의 몰입을 해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말이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순신은 혼자다. 극히 외롭고 힘겹다. 지난 임진년에 전투를 함께했던 유능한 참모들과 장수들은 대부분 칠천량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가능한 한 모든 방책을 점검하고 계획을 수립하여 탁월한 수완을 펼쳐야 한다. 다들 그렇게 이순신을 쳐다보고 있다. 이순신은 지금 모두가 미칠 것 같은 상황에 위태롭게 내몰려 홀로 서 있다. 이제까지 리더로서 이순신은 해상전투나 업무를 수행하면서 언제나 사기충천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몰입시켰다. 다시 잘 해낼 수 있을까? 카리스마 넘치는 예술적 리더 이순신은 노출된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며 쓰러진 병사들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이순신의 생각이 소용돌이친다. ① 천험(天險)의 울돌목은 적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지만, 우리 수군이 ‘울돌목에서의 골든타임(停潮 2시간)’을 잘 버티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천혜(天惠)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② 조류가 거센 울돌목의 특성상 정조(停潮)가 끝나면 일본 수군이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을 계속 구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③ 울돌목이 좁은 수로인 것으로 볼 때 일본 수군의 대선인 안택선(安宅船, 아다케부네)보다는 소선인 관선(官船, 세키부네) 위주로 명량수로에 진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④ 아직도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총통 등 무기체계가 왜선의 그것보다는 우수하다. ⑤ 긍정의 아이콘, 이순신에게 앞으로 벌어질 전투가 조선 수군에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왜적들의 급습과 이순신의 전략적 방책

 

조선 수군이 어란포 앞 해상에 머무르고 있을 때인 8월 28일, 일본 군선 8척이 급습해 왔다. 이순신은 직접 선봉에 서서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왜적을 물리쳤다. 이어서 벽파진에 머무르던 9월 7일 일본 군선들이 또 야습을 해왔을 때, 이순신 기함은 선두에 위치하여 적을 물리쳤다. 9월 9일 중양절에는 앞에서 언급한 제주에서 온 소 5마리를 잡아 수군들을 먹인다. 이와 같이 솔선수범의 자세로 부하들의 전의를 고양시킨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에게 강하게 신칙한다. 명량해전을 하루 앞둔 9월 15일 진도의 벽파진에서 울돌목 건너 해남의 전라우수영 앞으로 진을 옮긴 후, 부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필사즉생의 연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