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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백종근 목사, 구한말 호남선교의 거두 미국 남장로교 하위렴(William B. Harrison) 행전

by 해들임 2023. 8. 17.

구한말 이 땅에 처음 내한했던 각국의 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선교방식을 논의하면서 맨 먼저 선교지를 분담하자는 예양협정에 합의했다. 예양협정으로 분담된 남장로교의 선교구역은 충청도 일부와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 전체였다.

남장로교에 호남지역이 맡겨지자,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는 선교에 효율적인 거점으로 일단 전주와 군산을 후보지로 물망에 올렸다. 전주는 전라도의 수부였기 때문에 지부 설치를 당연히 여겼고 이어서 전주에 선교 물자를 공급하는 물류의 통로로써 군산을 꼽았다.

수로의 유리한 조건을 가진 군산은 제물포에서 배를 이용해 접근이 쉽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육상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물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개항 전부터 이미 선교사들은 일제의 수탈로 얼룩진 탁류의 금강이 아니라 전도선에 복음을 태우고 너른 호남평야를 이리저리 실어나를 수 있는 희망의 물줄기로 보고 있었다.

백종근 목사가 출간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해드림출판사)는 남장로교 선교구역이던 군산을 중심으로 호남에서 일생을 보낸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행적이다. 호남 선교사를 이야기할 때 종종 만나는 이름이지만 다양한 사역을 수행했던 선교사치고는 안타깝게도 그의 사적私積이나 기록들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유기遺棄가 되다시피 방치되고 있었다. 그게 어디 하위렴 선교사뿐이겠는가?

 

경건한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난 하위렴은 장래가 촉망되던 의과대학 시절 당시를 풍미했던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VM)’을 통해 이방 선교사로서 자신의 소명을 들었다. 이 부르심에 대한 그의 응답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자기 성취욕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결단이었다.

은자의 나라 조선을 놓고 기도하며 선교를 지원하는 순간, 그는 조선의 영혼을 위해 젊음을 불태우기로 작정했다. 그 당시 조선은 해외 선교사들에게조차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변방의 오지였다.

 

하위렴(William B. Harrison 1866 9 13~1928 9 22)은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해 의료, 교육, 복음 사역 등의 분야에서 전천후 사역을 할 만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선교사였으나 공교롭게도 그가 사역했던 3개 선교지부 어디서도 어김없이 그에게 스테이션 조성이라는 마뜩잖은 일이 맡겨지고 있었다. 전문적 지식이나 안목이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역이었으나 그는 이때도 어김없이 그의 역량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완수해 냈다.

병원과 학교건축 그리고 교회 설립 등을 포함한 유형의 선교기지 조성은 물론 나아가 공의회와 노회 설립에도 깊숙이 관여해 교회 정치와 제도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도 그의 역량을 발휘했다. 이처럼 그가 구축한 유무형의 인프라를 통해 그 이후의 호남선교는 발길이 훨씬 수월해지고 있었다.

 

백종근 목사는 애초부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행적을 책으로 엮어낼 생각은 없었다. 그의 행적을 마주한 것은 그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된 자신의 증조부인 백낙규 장로(동학농민항쟁 당시 우금치전투에 참여했다가 패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향리 익산에 동련교회와 계동학교를 세워 복음전파와 민족계몽에 앞장섰다.)의 개종의 과정을 좇으면서부터였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만난 빛바랜 자료 더미에서 건져 올린 그와 관련된 옛 기록들을 손에 쥐며 형언키 어려운 감회에 젖기도 하며 집필을 시도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전혀 생각지 않았던 더 값지고 귀한 부산물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조선 선교사 하위렴의 선교행전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그동안 발굴 수집된 자료들을 정리해 하위렴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보年譜에 맞춘 그의 삶을 전기형식으로 다루면서 무엇보다도 그의 조선에서의 사역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행여 따분하다 싶으면 이야기식으로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에 투사하기도 해 그의 삶을 좀 더 생동감 있게 대면해 볼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도 선교의 뒤안길에서 그가 겪었던 숨은 일화들을 하나라도 더 들추어냄으로써 그 당시 초기교회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게 했다.

 

하위렴의 행적을 좇으며 군데군데 인용한 이 책 속의 사진들은 필름에 저장된 것들이 아니고 인쇄된 자료에서 있는 그대로 퍼온 것들이라 비록 초점이 흐려 아쉽기는 해도 오히려 글로만 전할 수 없는 또 다른 면모를 전달해 주리라 여겨진다.

 

하위렴은 조선에서 만난 첫 번째 아내 데이비스(하단 참조)를 이 땅에 묻으며 그의 사역에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에드먼즈와의 재혼으로 그의 선교 여정에 재시동을 걸고, 온 힘을 다해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자신은 물론 아내 에드먼즈의 건강마저 해쳤을 뿐만 아니라 노산老産의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또 한 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1912년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돌아가 3년 가까운 요양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이때가 선교사로서 그의 진퇴를 결정해야 할 만큼 그에게 닥친 최대의 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으로 복귀해 맡겨진 사역을 기꺼이 감당하며 마지막까지 묵묵히 고군분투했다. 그의 은퇴와 더불어 2개월 만에 찾아온 죽음은 그것을 웅변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디모데후서 4:5~6)”

 

하위렴 선교사 역시 자신이 떠날 기약이 가까웠음을 예견하면서도 그는 맡은바 전도자의 직무를 끝까지 감당하고 생을 마감했다.

복음을 들고 외길을 줄달음쳐 사명을 완수한다고 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증인의 사역은 바로 그분의 임재와 함께 부어지는 능력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위렴 선교사가 이 땅에서 이뤄낸 사역의 풍성한 열매들 역시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를 출간하게 된 것은, 그가 조선 땅에 쏟아부은 고귀한 헌신과 사역을 추적하며 그의 선교 여정을 드러내 보고자 한 것은 전체적인 한국 선교사宣敎史를 바라보게 하는 귀중한 단서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키워낸 맹아萌芽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결실을 수확하면서도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송구스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하위렴 선교사 첫 번째 부인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선교사(1862-1903)

 

리니 데이비스 해리슨 선교사(Linnie Davis Harrison)는 1862년 미국 버지니아(Virginia) 주 에빙던

(Abingdon)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 어머니의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조선(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1892년 10월 17일 남장로교 최초의 7인 선교사 중 한명으로 조선(한국)에 오게 된다.

서울에 도착하여 알렌(Allen) 선교사의 집에 머무르다가 서대문 선교부로 옮겨 동네 아이들과 부인들을 사귀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평균 80여 가정을 심방함으로써 일년 동안 무려 1,693명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밤에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경과 찬송을 가르쳤다.

 

1896년 군산 선교부에 배치되어 어린아이들과 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1893년 해리슨(하위렴)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남편 해리슨 선교사는 4살 연하로 그녀보다 2년뒤 조선(한국)에 온 의사로, 목사 안수를 받은 선교사로, 전주에서 사역 중이었다.

이들은 전주에 터전을 잡고 어린아이들과 부인들, 그리고 환자들을 향하여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김창국 소년을 자기 집 사환으로 채용하고, 가르침을 통하여 훗날 훌륭한 목회자가 되게 하였다.

(출처: https://kosinusa.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4_6&wr_id=108235)

 

하위렴 선교사 연보(年譜)

 

 1866 9 13 : 미국 켄터키주 레바논(Levanon, KY) 출생

 1883~1888 : 켄터키 리치몬드(Richmond, KY) 센트럴대학교(Central Univ.) 화학과 졸업

 1889~1991 : 루이빌대학교(Louisville Univ.) 메디컬 칼리지 수학

 1892~1894 :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입학

 1894 9 : 트랜실바니아 노회(Transylvania Presbytery)에서 목사안수

 1894~1895 : 켄터키주 메이슨 카운티에 소재한 메이스 릭(Mays lick) 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사역

 

 1896 1 : 남장로교 조선 선교사로 파송

 1896 2~8 : 서울에 도착해 언어훈련 북장로교 의료 사역(2~4)에 동참

 1896 9 : 유진 벨(Eugine Bell/배유지)과 함께 부산을 거쳐 좌수영 일대 탐사 여행

 1896 11 : 유진 벨(Eugine Bell/배유지)과 함께 나주, 강진, 영암 일대 탐사 여행

 

 1896 11 23 : 전주선교부 부임

 1896 12~1897 2 : 군산에서 진료 활동

 1897 3 : 전주로 돌아와 의료 사역

 1897 10 : 6회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회장 피선

 1898 6 : 린니 데이비스(Linnie F. Davis)와 결혼

 1900 11 5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전주 선교지부 테이트(Lewis B. Tate)와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와 함께 전주에서 사역

 1903 : 화산 스테이션 구내 진료소와 선교사 숙소 건축

 1903 6 20 : 린니 데이비스(Linnie F. Davis) 사망

 

 1904 9 : 군산 선교지부에 부임(스테이션 조성공사 / 순회사역 / 영명학교 사역)

 1906 3 : 의료선교사 다니엘(Thomas H. Daniel)과 함께 진료소 건축 완공

 1907 : 간호사 숙소와 진료소 증축, 선교사 숙소 건축

 1908 6 1 : 캐나다에서 에즈먼즈(Margarret J. Edmunds)와 재혼

 

 1909 9 : 목포로 복귀 순회 사역과 남학교 운영, 스테이션 건축공사

 1910~1912 : 스테이션 구내에 3채의 주택을 건축하고, 목포진료소와 정명여학교 신축

 1912 :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감

 1915 2 27 : 한국에 복귀

 1921 2 18 : 내한 선교 25주년 기념 예배

 1921 : 개신교 선교부 공의회 대표

 

 1922 4 1 : 안식년을 맞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

 1924 : 군산으로 복귀 익산, 부여 등지의 순회사역

 1928 7 20 : 32년 한국선교를 마치고 귀국

 1928 9 22 : 켄터키 루이빌(Louisville, KY) 침례교병원에서 소천 켄터키 레바논(Lebanon, KY) 라이더 공원묘지(Ryder Cemetry)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