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년 동안 사업장을 끌어오면서 제2금융권의 도움을 받아보기는 이번이 두 번째이다. 당장 급할 때 까다로운 요구나 절차적 시간 낭비 없이, 선뜻 자금을 빌려준 OK저축은행이 구세주처럼 다가온 하루였다. 물론 그만큼 또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이다.
사실 제2금융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사채라도 되는 양 경계하였었다. 그런데 현대캐피탈을 통해 처음 대출을 받아본 이후, 시중은행보다 이자만 조금 높을 뿐 차이가 없다는 걸 알았다. 오히려 간소화된 대출 절차가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몇 해 전이었다. 미국 교포 한 사람이 출간을 하고자 찾아와 상담을 마친 후, 우리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한 자리에서 꺼낸 말이었다.
“사장 마음은 아내가 함께 일해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힘든 법이다. 직원들이 사장님을 잘 도와주시라.”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저자도 오랫동안 사업을 한 사람이었다. 내 처지를 꿰뚫고 있는 듯한 그의 말이 눈시울을 뜨끈하게 하였다. 하지만 요즘 어려운 회사를 위해 희생하려는 직원이 있을까.
서민들의 빠듯한 삶은 당장 한 달 봉급만 밀려도 바로 타격을 받는다. 회사 사정은 사장 개인 사정일 뿐이다. 사장이 직원들에게 무언가 희생을 바란다면 그것은 7~80년대의 마인드이다. 능력이 없으면 애초 직원을 고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좀 어렵더라도 조금만 참자. 나중에 두 배 세 배로 대우해줄게.”
젊은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사장의 무능함만 드러날 뿐이다. 나중이란 없다. 사장은 고용상 의무를 제때 이행하고, 대우가 부족하다면 그 선택은 직원 몫인 세상이다. 그럼에도 그 저자의 말이 지금도 귓가를 맴돌곤 한다.
요사이 술 없인 잠들지 못할 만큼 고민이 깊었다. 자금이 좀 필요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손 내밀 데라고는 없었다. 아니 애초 그럴 곳이 내게는 있을 수 없었다.
한때는 신용카드 회사가 고마웠다. 자금 순환이 더딜 때, 누군가에게 구차한 소리 해가며 돈을 빌리기 보다는 자유롭게 현금서비스든 카드대출이든 급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해주니 영세사업자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돈을 빌려 쓰면서도 연체만 안하면 추호도 자존심 상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끝없이 추락하는 신용도였다. 다중채무자라는 오명도 등록된다. 1년 동안 단 한 번의 연체가 없어도 신용카드는 영세사업자에게 필요악인 셈이었다. 참 억울한 일이다. 물품은 물품대로 구매하면서, 높은 이자를 지불하며 돈을 써주면서도 위험등급 소지자로 노출 되는 것이다. 결국 돌아오는 것은 고객의 대우가 아닌 위험군 취급이었다.
신용등급은 대부분 ‘가능성’을 가지고 매겨진다. 발전 가능성, 지속 가능성이 아닌 현 시점의 가능성이다. 어쩌다 한 번 연체하면 앞으로도 연체할 가능성을 가지고 등급을 매긴다. 사업하다 보면 연체도 할 수 있고, 거푸 대출도 받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영세사업자치고 우리나라에서 신용등급 높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신용등급 챙겨가며 사업장 꾸려갈 여유가 있으면 여북이나 좋을까.
사장은 파도와 싸워가며 구멍 난 곳으로 파고드는 물을 퍼내면서 배를 항구에 무사히 정박시켜야 하는 선장과 같다. 이처럼 오랜 시련을 견뎌온 사업자는 신용도가 낮다고 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사업장을 이끌어오며 겪은 갖은 수모로 단련될 만큼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늘 기죽어 있지만 알게 모르게 축적된 내공이 든든한 버팀목이이요, 자본이기도 하다.
사정이 어려울 때 들어온 자금은 어두운 터널 속으로 파고든 햇살이다. 그래서 ‘햇살론’이라는 게 나왔는지도 모른다.
영세사업자에게 시중은행의 문턱은,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으로 기어올라야 할 만큼 높다.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받아 제1순위 저당권을 설정해가면서도, 또한 보증보험회사 같은 곳에서 보증을 서주는데도, 시중은행은 마치 이중처벌하듯 왜 개인 신용도라는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를 일이다. 설혹 채무자가 부도가 나더라도 담보권이 설정되어 있거나 보증회사의 보증이 있으니 그들이 손해 볼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시중은행에서 대출 한 번 받으려면 온갖 서류를 준비해야 하고, 온갖 동의를 다 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지극히 보호되어야 할 사생활조차 드러난다. 주민등록등본과 초본, 가족관계 확인서 등의 서류 제출을 통해서다.
1천만 원 대출 받는데 채무자 앞으로 챙긴 서류 뭉치가 5센티 높이는 될까.
아직도 우리나라는 관공서든 어디든 불필요하게 챙겨야 할 서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몇 만 원짜리 어느 고등학교 포스터 하나 만드는데 제출해야 하는 서류로, 견적서를 비롯하여 물품승낙사항, 청렴서약서, 수의계약서 등도 제출해야 한다. 단 돈 몇 만 원 받는데 왜 이런 서류들이 필요한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나 중앙정부 입찰에 참여하고 싶어도 영세사업자들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어떤 물건이든 물건을 제작하는 데는 영세업자도 뒤질 게 별로 없다. 대부분 제조업은 시스템화 되어 있어서다. 영세한 출판사일지라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책자를 만든다면, 제작에는 별다른 장애가 없다. 모든 작업을 출판사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각 분업 파트너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세사업자는 참여 조건을 채울 수가 없어, 입찰 참여조차 엄두를 못 낸다.
신용도 낮다고 사업 못할 일 아니다. 신용도가 희생되더라도 단단히 키를 잡고 항해하다 보면 언젠가 아름다운 항구는 보일 것이다.
OK저축은행 대출은 대부분 전화로 간편하게 이루어졌다.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려줄 만큼의 신용등급은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로 대출을 이끌어주는 담당자들도 친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기 번호표를 받고 언제 앞사람들 상담이 끝날지 모를 대출 창구 앞에서 마냥 기다려야 하는,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 또 마냥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 시중은행 대출 창구와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다. 시중은행 대출창구로 가면 젊은 직원 앞에서 마치 죄인인 듯한 기분이 드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신용도가 훼손될지언정 돈을 빌리면서도 전혀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상대를 마주하지 않고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오늘 직원들 봉급 주고 나면 바로 다음 달 봉급 걱정을 해야 하는, 한 달 내내 외로운 영세사업자들에게 신용등급제는 노비문서와 같은 존재인 듯하다. 여유자금이나 비빌 언덕도 없이 출판사를 창업하다 보니, 어지간히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우리나라 영세사업장 가운데 출판사가 가장 어려운 사업장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다. 출판사는 책이 팔려야 살아남는데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독서율이 꼴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 팔리는 물건의 제조업을 하는 셈이다. 책 판매량이 밥인 작은 출판사들은 늘 허기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더라도 열심히 책을 만들고 밤새워 홍보를 한다. 비 없는 사막에다 도토리를 심어 숲을 이루고, 북한산 인수봉이라도 흔들어 보겠다는 심정으로 지금껏 뛰어왔다.
제2금융권도 공신력 있는 회사인데 급할 때 편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자가 좀 비싸고 신용도가 좀 떨어지면 어떠랴. OK저축은행 도움을 받고 보니, 자본력이 넉넉해지더라도 필요할 땐 시중은행보다 OK저축은행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특별한 서류 절차도 없이 통화 몇 분으로 불쑥 자금을 빌려주는 곳이야 말로 가난한 기업인들에게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당장 눈앞의 현실만 반영되는 신용등급제도는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영세사업자의 발전을 억누르는 제도가 아닌가 싶다. 더구나 신용등급이 낮으면 인간 등급조차 낮은 듯한 자괴감을 느끼게도 한다. 신용등급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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