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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최고위층이 되기까지, 이상식 전 부산경찰청장 이야기

by 해들임 2024. 1. 9.

경찰대 수석입학과 행정고시 1차 2차 동시합격 그러나 3차 시험 탈락, 다음 해 최종 합격

다음은 이상식 전 부산경찰청장의 책 [멈추지 않는 도전]에 실린 내용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이 전 청장은 타고날 때부터 반골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지 싶다. 영남, 특히 대구라는 지역은 현대사에서 지극히 보수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하지만 본래 대구 사람들은 조선이나 일제강점기에서 보듯이 반골기질이 본성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전 청장은 김부겸 전 총리나 추미애 전 장관을 떠올리게 한다. 청렴하고 강직하고 강골한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 여정이 있더라도 끝내 성공한 삶을 이룬다.

경찰대에 수석 입학한 이 전 청장은 졸업 후 바로 행정고시 1, 2차를 동시에 합격한다. 하지만 3차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필자도 사법시험 생활을 오랫동안 해봐서 알지만, 3차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 해에 최종 합격을 이루어낸다. 수재들이나 이루어내는 굉장히 빠른 고시합격이다.

 

“경찰대학과 고시공부, 치열했던 단련의 시간”

 

경찰대학 5기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지서 경찰관이 오토바이로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내가 수석한 것보다도 경찰관이 자신에게 깍듯이 경례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경찰신문 인터뷰를 위해 아버지와 나는 서울로 갔다. 부자는 서울 가면 무슨 대단한 대접을 받는 줄 알고 들떴다. 높은 분을 만날까 싶은 기대도 가졌다. 그러나 우리를 맞이한 것은 그닥 대단할 것도 없는 경찰신문사 편집실이었고 나는 생각나는 대로 모범답안 같은 인터뷰를 했다. 그것이 다였다. 우리는 좀 허탈했다. 그런 우리 기분을 아는지 경찰신문사 대표님이 근처 중국집에서 시골서는 먹기 어려운 요리도 시켜주고 내려가는 차비하라며 용돈 3만원을 주셨다. 우리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리곤 축하차 찾아온 마을사람들에게 치안본부에 가서 높은 분과 차도 마시고 격려도 받았다고 없는 자랑을 했다.

동네 어른들에게 완전 어깨가 으쓱해진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을 때가 많아졌다. 공부 잘하는 아들이 가고 싶은 대학에 못가고 고생길 훤한 특차대학에 들어가는데 어느 어머니인들 기뻐할 수 있으랴.

보통 대학은 3월에 개학하는데 우리는 한 달 당겨 2월 초에 소집되어 입학전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일반 대학을 간 친구들은 미팅이다 뭐다 그간 고생한 끝의 낙을 누리는데 우리는 추운 겨울에 고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경찰대학에 입학하러 집을 떠나는 날은 입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나는 내가 탄 버스가 떠나자 돌아서서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눈물 젖은 빵이란 게 어떤 것인지 어슴프레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입학 첫날 선배들은 우리의 혼을 쏙 빼놓았다

“머리 박아, 엎드려뻗쳐, 집합, 선착순…….”

그야말로 정신을 빼놓는 순서다. 그리고 옷 갈아입기, 사복을 벗고 하나씩 나눠주는 여러 종류의 옷을 입으면서 부착물을 바느질로 달았다. 줄줄이 머리를 깎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나눠주면서 신속, 정확, 복명복창하면서 군대식 단체 규율을 몸에 익혔다. 이때 얼마나 ‘선배님, 선배님’이라는 복창을 많이 했으면 1학년 첫 외박 때 모교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선배님’이라는 말이 계속 튀어나올 정도였다.

경찰대학 1학년 동안 내 삶과 정신은 매우 단조로와졌다. 엄격한 규율과 힘든 훈육,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정신마저 메마르고 단순하게 만들었다. 대학생 필독서라고 씌여진 책들을 읽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추상적인 개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몇 번씩 읽어도 문장의 뜻이 파악되지 않았다.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내가 어째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출강 오는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여러분의 입시점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보다 훨씬 높은데 같은 시험문제를 내는데 경찰대학생 여러분의 성적이 훨씬 못하니 이해가 잘 안됩니다.”

반면 향상된 것이 있다면 외견상 보이는 육체적 강건함이었다고나 할까?

대학 1학년 2학기였나 싶다. 미국인 영어교사가 ‘robust’라는 단어를 말하고 나서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Yes, you can say he is robust”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도 ‘억세다’란 뜻의 robust란 단어를 좋아하지만 정신이 무뎌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또 나를 눈여겨 본 어느 교수님은 나더러 외출을 나가면 ‘교보문고에 가서 책도 사 읽고 영화도 자주 봐라. 그래야 경찰대학같은 교육에서 생길 수 있는 지적 단순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교수님의 충고를 충실하게 이행한 편이다. 그리고 지금도 시간이 나면 서점에 들리는 것을 좋아하고 영화보는 것을 즐긴다.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정신적 여유가 생긴 것은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경찰대학에서는 고시 열풍이 불었다. 나도 당연히 그 대열에 동참했다. 경찰대학은 학업과 훈련을 동반해야 하므로 공부에 전념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그 상황을 이겨내며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했던 외교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학 3학년 때 외무고시에 도전했다. 1차에 무난히 합격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4학년이 되자 나는 그만 매너리즘에 빠졌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무기력증 비슷한 것에 시달린 것으로 생각된다. 찬바람이 불면서 나는 외무고시를 포기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신포도처럼 외무고시에 합격하면 외국으로만 돌아야 하는데 그건 싫다는 식이었다. 그리곤 행정고시를 보기로 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때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부 잘하는 아들을, 늘 선망하시던 서울대학에 보내지 못해 내내 가슴 아파하시다가 대학원이긴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학교 학생이 된 아들을 많이 자랑스러워 하셨다.

졸업 후에 치안 현장에 배치된 동기들과 달리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 나갔다. 서울대 근처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다. 나는 밤을 새워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꾸준히 공부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암기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1차에 무난히 합격했다. 대학 때 외시 공부를 준비하던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행정고시 1차에 이어 한 달 후에 곧바로 응시한 2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천재들만 가능하다던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1·2차 동시 합격 통보를 받고 날아갈 듯 공중에 뜬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든가,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3차 면접에서 탈락한 것이다. 며칠 들뜬 기분을 진정시키고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생각했다.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다 몰린다는 행정고시에 나처럼 날치기로 합격할 수는 없는게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공부한 양이 적었으니 성적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나이도 가장 어린 축에 들어 고배를 마신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고시 3차 탈락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1백 대 1이 넘는 행정고시 1, 2차를 통과했다는 자체가 어려운 관문인데, 182명 중 2명을 추려내는 3차에서 낙방을 한 것이니 통한이 아닐 수 없다. 그때 경험을 인생의 돌다리로 삼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한 후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상심이 컸으나 절치부심하여 1년간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그래서 마침내 34회 행정고시에 무난히 합격하였다.

1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깨달은 게 있다. 원 없이 공부했어도 점수가 올라간 과목은 국민윤리뿐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그래서 고시제도의 유용성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고시는 결국 과거제도의 유산이다. 현대의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고시를 폐지하거나 크게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경찰대학도 마찬가지다.

나의 모교이기는 하나 크게는 국가, 작게는 조직의 측면에서 시대적 소명을 달성하였으므로 발전적 해체를 생각할 시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경찰대학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게 있다. 1987년 경찰대학 3학년 봄이었으니까 두 해 위인 3기들이 졸업하기 이틀 전 쯤이었다. 졸업식 예행연습을 하는데 학장의 졸업식 축사가 문제였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께 충성을 맹세하고’란 구절이 나왔다. 순간 술렁거림이 일었다.

그날 밤 동기들 전원이 모여 동기생 회의를 개최했다. 학장 축사에 대한 성토가 터져나왔다. 졸업식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강경 목소리가 득세했다. 당시 조영석 동기생 회장과 내가 분위기를 주도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당시 분위기는 심각했다. 아직은 권위주의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가 아니었는가. 불과 몇 달전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한 터였다. 집단 행동을 결의한 우리들이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은 부모님의 존재가 의사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였다. 우리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에는 우리의 결연한 뜻을 학생지도부에 전달했다.

학교측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전두환정권 시절이었지만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도 어려웠고 대량 퇴학조치 등을 하기에도 무리였을 것이다. 다른 학년에서 동조하지 않고 우리 5기만 반발했지만 반발의 강도가 예상보다 셌던 것이다. 당시 학생지도실장은 지금 국민의힘 김석기 의원이다. 그는 당시 “이상식과 조영석이 가장 강경하다”며 한숨 쉬듯 말했다.

결국 학장이 양보를 했다. 졸업식 당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졸업식 학장 축사에서 ‘전두환 대통령 내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라는 구절은 빠졌다. 6월 항쟁으로 6.29 선언이 나오기 3달 전 일이다. 경찰대학 같은 특수한 집단 내에서조차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표출될 시대였을진대 바깥 세상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