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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아들이 91세 어머니를 위해 만든 잔치국수, 에게?

by 해들임 2024. 1. 7.

서울과 어머니가 계신 순천 고향을 오가며 일한 지 열 달쯤 되었다. 서울에서나 순천에서나 출판사 운영하며 돈 버는 데는 아둔하여 늘 허덕이지만, 어머니가 있는 고향에서 일하면서 마음껏 자연과 교감하다 보니, 도시의 상처로 가득한 가슴은 상당히 치유가 된다. 내 정서 또한 별과 숲과 바다로 갈수록 충만해진다. 나목이 간시히 매달고 있는 마른 잎사귀 하나조차도 눈물이 갈쌍해질 정도로 정감이 가는 시골 생활이다. 고향 마을은 순천 시내에서 2~30분 떨어진 별량면 덕산이라는 곳이다. 순천과 벌교 중간쯤이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순천 사무실로 나가는 대신 시골집에서 온종일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침을 먹으면서 어머니께 점심때는 잔치국수를 하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었다. 부드러운 잔치국수를 91세 어머니도 잘 드시는 편이다. 솜씨가 있든 없든 지난여름에는 몇 번 해드렸으나 이번 겨울에는 한 번도 해드린 적이 없었다.

시골집 마당 가 텃밭에는 포기가 작은 배추가 아직 남아 있어서 배춧속을 데쳐 넣으면 어떨까 싶었다. 마침 시금치도 있어서 잔치국수의 비주얼 디자인을 꾸미는 데 사용하기로 하였다.

배춧속과 시금치를 씻었다. 노오란 배춧속 색깔과 짙도록 푸른 시금치 색깔이, 사방이 흙빛인 한겨울 색깔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 겨울 이토록 싱싱한 야채와 함께하는 것도 추위를 잊게 한다. 보기만 해도 내 안의 기운이 생기롭다.

잔치국수를 하는데 내게 특별한 레시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넣어서 한다. 국수를 삶으려고 끓이는 물에 배춧속과 시금치를 데친 후 건져 담아두었다. 순이 죽어도 색깔 곱기는 마찬가지다. 텃밭의 배추들을 부지런히 뽑아 된장국도 끓이고, 데쳐서 나물로 해먹어야 할텐데, 평소에는 순천 사무실로 출근을 하니 언제 다 먹나 싶다.

우리 시골집은 수돗물이 없다. 대신 사시사철 쏟아지는 지하수를 먹는다. 시골집의 가장 장점 가운데 하나가 마음껏 생수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수압도 장난이 아니다. 국수를 삶은 다음, 찬물로 헹구었다. 국수 삶는 게 제일 쉬운 듯싶다. 어머니와 내가 먹기에는 국수 양이 좀 많아 보인다. 여전히 나는 요리를 하면서 감 잡는 데 서툴다.

육수는 시중에서 파는 육수용 포를 두 개 넣었다. 한참 끓이다 맛을 보니 다소 싱거워서 고체 육수 한 알을 더 넣었다. 육수 맛이 싱거운 듯 간이 맞는 듯하다. 먹다 보니 한 알 더 넣을 걸 했다. 육수는 시간이 있으면 충분히 더 감칠맛 나게 할 수 있는데, 어머니가 왔다갔다하시니 마음이 급했다.

이제 남은 건 김과 계란 지단인데, 김은 시중에서 파는 반찬용 김 두 개를 뜯어 가위로 가늘게 잘랐다. 문제는 계란 지단이었다. 어머니가 벌써 식탁에 앉으셔서 냉장고의 반찬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계란 프라이를 통째로 올리기로 하였다. 이미 배춧속과 시금치가 비주얼의 구색은 갖추어져 있기도 하다.

오, 그런대로 때깔은 난다. 나는 이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국수 양을 보시고는 기겁을 하신다. 먹고 남기시라 하였다. 고체 육수 한 알만 더 들어갔으면 간이 딱 맞았겠지만, 그럼에도 김장 김치가 있으니 간을 맞춰 먹을 수 있었다. 양 많다고 놀라시던 어머니가 한 그릇을 다 비우신다. 마음이 흡족하다.

어머니를 생각해서 데친 배춧속을 좀 더 잘게 찢어야 했다. 잔치국수 고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국수처럼 잘게 넣어야 후룩후룩 먹기 좋은 모양이다. 다음에는 더 맛있게, 더 보기 좋게 할 수 있지 싶다. 음식은 천천히 은근하게 해야 제맛이 나나 보다. 요리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가, 91세 어머니와 살면서 이것저것을 다 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