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용두 마을에는 젊은 무녀가 살았습니다. 무녀는 거의 하루도 빠질 날 없이 굿을 하였습니다. 이웃 구룡 마을과 용두 마을의 용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나, 고기 잡는 마을 사람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는 물론, 마을 사람의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에도 굿을 하였습니다.
무녀에게는 솔희라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솔희는 어릴 때부터 굿을 하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장구를 쳤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솔희의 장구 치는 솜씨는 신기를 더해갔습니다. 나비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며 느렸다가 빨랐다가 하는 장구 소리, 거의 혼을 빼놓는 양손의 장구 난타는 이웃 마을 구룡과 덕산까지 들썩이게 하였습니다. 솔희는 굿이 없는 날에도 용머리 절벽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신들린 듯 혼자 장구를 쳤습니다. 특히 보름달이 중천으로 오르고, 찬물때가 되어 윤슬이 떼 지어 바다 위에서 고요히 반짝일 때, 솔희의 장구소리는 듣는 이의 숨을 멎게 하였습니다.
용머리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굿을 하던 어느 날, 장구를 치는 솔희가 점차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황새들이 용머리 솔숲으로 하얗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이웃 마을 구룡의 용들과 용두의 용조차 꿈틀거렸습니다. 이후로 솔희가 장구를 치면 어김없이 용들과 황새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용두의 용은, 솔희의 장구 치는 자태와 장구 소리에 빠져 솔희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용이 무녀를 불렀습니다. 솔희를 자신에게 시집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거부하면 용두에서 더는 굿을 못 하게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솔희는 용에게 시집가는 게 몹시 싫었습니다.
용이 정한 혼삿날이 점점 다가왔습니다. 모녀의 근심은 깊어만 갔습니다. 가엾은 두 모녀를 도와줄 어떤 이도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용머리 절벽에서 또 굿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용들과 황새들은 그날도 솔희의 장구 리듬을 따라 춤을 추었습니다. 솔희의 장구 소리는 그날따라 애간장을 끊을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구를 치며 절벽 가까이 다가간 솔희는 절벽 아래 갯바위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다 황새들이 슬피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충격이 컸던 용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산이 터질 듯 몸을 비틀이며 울부짖다가, 그만 입안의 여의주가 멀리 개펄 바다로 튀어 나가고 말았습니다. 개펄로 떨어진 여의주는, 두 개로 쪼개지더니 작은 산봉우리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용두 사람들은 그 섬을 장구섬이라고 불렀고, 황새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던 솔숲을 황새등이라 불었습니다.
허리가 장구처럼 잘록한 장구섬이 있는 용두 앞바다는 하루 두 번 밀물이 들어왔다가 나갑니다. 밀물이 장구섬을 잠기며 들어와 용두항 갯바위로 부딪치면, 지금도 낮은 갯바위에서 여린 장구 리듬이 들립니다. 장구섬을 가만 바라보고 있어도 장구 소리가 이명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스토리텔링 이승훈
요즘 노모를 위해 한 달이면 절반 정도 순천시 별량면 고향 덕산에서 머뭅니다. 덕산에서 머물 때면 순천시 순고오거리 사무실로 출퇴근을 합니다.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일하는 셈이지요. 덕산에서 이른 새벽 눈을 뜨면 마을 앞 개펄 바닷가로 나갑니다. 거기에선 어릴 때부터 보아온 옆 동네 용두의 장구섬이 늘 고즈넉하게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장구섬은 항상 무언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전설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며칠 전 용두항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밀물이 넘실거리는 갯바위에 앉아 장구섬을 바라보다 나름대로 스토리텔링을 구상해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모여듭니다. 덕산 앞과 용두 앞과 건너편 거차항까지는 어쩌면 숨겨진 관광 보물이기도 합니다. 개펄강이 흐르는 덕산 앞 개펄은 보호하고 보전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나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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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섬
-이승훈
밀물 때
봉우리 두 개
살끔 솝뜨는
개펄 위 봉긋 솟은 섬
고독의 실체
파도 없는 바다
뭍을 향해 뱉어내는
옹알이 같은 물결
용두항 갯바위
수천 년 세월 몸이 팼다
꼬막처럼 작은
인적 없는 장구섬
그 애틋한 영원
전설 하나쯤 지녔을
고향의 꽃등
하현달 이울어가는
조금이 다가오면
검은 개펄 위로 쏟아질
별들의 섬, 새알처럼
사랑 하나 남겨도 좋을
잠결도 울렁이는
일곱 물 보름밤
그곳 장구섬
천년 세월을 베고
하룻밤 묵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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