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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끓여 본 꽃게라면, 과음한 다음 날 해장국이 되다

by 해들임 2024. 11. 11.

소음이 그리워서 멀리 마을 앞 도로를 향해 귀를 세운다. 시골집은 오후가 되면 산중 분위기나 다름없다. 마을 앞 도로를 오가는 희미한 차량 소리는 숲을 헤집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다. 오늘따라 적막이 감도는 까닭은 세 살, 다섯 살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가 떠난 조카네 가족의 빈자리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형의 둘째 딸인 조카가 조카사위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 왔다가 떠난 것이다. 암 투병을 하다 세상을 떠나면서 형은 내게 두 딸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두 녀석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 나는 형에게 늘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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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나, 둘이 생활하는 시골집은 가끔 두 손주가 내려오면 녀석들을 쑥쑥 키워 올려보낸다. 방에서 마음껏 뛰거나 장난치거나 웃고 떠들어도 누구 하나 간섭할 사람이 없는 곳이 시골집이다. 이슬이 흠씬 적은 마당 잔디밭을 아침부터 헤집고 다녀도, 마을 앞 기다란 들판 길을 따라서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킥보드를 탄 채 달려도 별로 위험한 것이 없는 시골이어서, 이삼일 사이 손주들은 훌쩍 자란 모습이 비낀다.

서울 아파트에서 만나는 손주와 시골집에서 만나는 손주는 느낌이 다르다. 시골 자연 속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서로 부대낌이 훨씬 부드럽고 따스하다. 서로 부대끼는 데 제약이 없으니, 정이 그만큼 깊게 들어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그야말로 시골집은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이다.

 

조카네는 금요일 정오쯤 내려왔다. 잠자는 아이들을 깨워서 오느라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줄곧 5시간을 넘게 달려왔다. 점심조차 거르고 달려왔으니 배고플 거 같아 부랴부랴 점심을 차려주었다. 어머니가 생선을 굽는 동안, 마침 곰탕국이 있어서 어머니와 내가 먹는 반찬을 꺼내 상을 차렸다. 조카사위가 밥 두 그릇을 금세 비운다.

 

늦은 오후 아이들을 데리고 벌교 시장으로 들어섰다. 우선 마트에서 고기와 술, 야채와 아이들 간식거리를 챙긴 후 어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조카가 꼬막이 먹고 싶다 하여 참꼬막을 샀다. 미리 말하자면 참꼬막은 새꼬막보다 비싸기만 할 뿐 맛이 없다. 결국 난 어머니에게 꼬막을 잘못 샀다며 핀잔을 듣고 말았다. 삼겹살과 함께 굽는 데는 주꾸미가 그런대로 괜찮다. 조카사위는 해산물보다 고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조카는 해산물을 잘 먹는 편이다.

 

나는 아이들이 내려와 함께 시장을 볼 때면 꼭 챙기는 게 있다. 그것은 술 마신 다음 날 아침 먹을 해장국용 해물이다. 두 조카사위도 술을 제법 마시는 데다 조카들도 한 잔씩 해서, 아이들이 내려온 저녁이면 술상이 차려진다. 나 역시 술을 좋아해서 사위와 조카와 술잔을 기울일 때면 늘 껴안고 사는 삶의 외로움이 스멀거릴 틈이 없어진다.

이번에는 아침 해장국용으로 꽃게를 샀다. 종종 TV 화면에서 꽃게 라면을 끓이는 장면을 보면 나도 한 번 요리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였다. 조카와 조카사위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알을 밴 암게 3마리가 3만원이었다. 평소에도 체감하는 것이지만 벌교 시장의 생선은 대부분 비싼 편이다. 주꾸미도 3만 원, 꼬막도 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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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과음을 한 탓인지 몸도 마음도 개운치 못하다. 그래도 미리 준비해 둔 조카와 조카사위 속풀이 해장국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꽃게는 지난밤 어머니가 미리 손질해두셨다. 나는 요리를 하면 별로 버리는 게 없는데, 어머니는 커다란 꽃게 뚜껑을 모두 버리셨다. 꽃게 뚜껑에서 무엇이 우러나올지는 모르지만, 꽃게 뚜껑은 꽃게의 시각적인 맛을 내는 데는 그만인데 어머니가 모두 버리시는 게 아쉬웠다. 왜 버리냐고 따지면 어머니의 핀잔이 바로 꽂힐 일이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었다.

 

라면, 야채스프, 양념 스프를 개봉하여 별도로 담아두었다. 어머니가 아침을 안 드신다고 하여 라면 4개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모두 끓이기로 하였다. 어제 사온 콩나물과 다진 마늘, 대파 등도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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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어머니가 손질한 꽃게를 끓였다. 부드러운 꽃게 살이 부서지는 데다 꽃게 뼈에서 상당한 거품이 우러나왔다. 처음에는 거품을 걷어냈지만 이내 포기를 하였다. 거품에는 부서진 꽃게 살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 꽃게 끓는 물이 살짝 넘치고 말았다. 물이 넘치면서 부서진 꽃게 살이 달라붙어 냄비 주변이 금세 지저분해졌지만 어쩌랴. 혹여 콩나물을 넣으면 더 시원한 국물이 될 거 같아 콩나물도 넣었다. 콩나물을 듬뿍 넣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양이 많아질 거라며 조금만 넣어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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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이 데쳐졌다 싶을 때 드디어 라면과 스프를 투하하였다. 양념 스프가 들어가니 꽃게 라면의 색채가 본색을 드러낸다. 달걀도 두 개 넣었다. 달걀 흰자위와 부서진 꽃게의 하얀 살이 꽃게 라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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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끓였는데 어머니가 아침을 안 드시겠다니 아쉬웠다. 어머니는 저녁을 좀 많이 드신 날을 다음 날 아침을 거르시곤 한다. 오래전 콩팥 수술을 하신 후로는 음식을 조금씩 드시는 편이다. 하는 수 없이 세 사람 그릇에 라면을 모두 담았다. 그야말로 꽃게 라면 곱빼기다.

 

 

순수 라면보다는 꽃게와 마늘, 대파, 콩나물이 들어간 꽃게 라면 국물이 훨씬 시원한 맛을 자아냈다. 지난밤 모두 과음을 하였는데도 곱빼기 꽃게 라면 한 그릇을 한 방울 국물도 남김없이 모두 비웠다. 그동안 무척 요리해 먹고 싶었던 꽃게 라면, 세 마리 가운데 두 마리만 넣었고 한 마리는 된장국용으로 남겨두었다. 두 마리 꽃게가 들어갔어도 중국 음식점에서 1만 원이 훌쩍 넘는 해물짬뽕 가격보다는 저렴한 편이었다. 물론 중국집의 해물짬뽕보다는 꽃게 라면 맛이 훨씬 깔끔하고 부드러우면서 맛이 있었다.

 

시골집 앞 골목길은 내리막이다. 손주들이 이 골목길에서 킥보드를 타곤 하는데 내리막이라 위험하다. 그래서 마을 앞 들판 길에서 마음껏 타게 해주고 싶어 데리고 나갔다. 사람도 차량도 없는 들판 길, 아니나 다를까 손주들은 원 없이 킥보드를 즐긴다. 들판 너머 개펄 바다 둑길에서도 손주들은 정신없이 달렸다. 녀석들이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 하였지만 용케도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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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별량면 화포해변

조카와 조카사위에게 바다 훤히 보이는 곳에서 커피를 사주고 싶었다. 우리 마을과 가까운 곳이 화포해변이다. 개펄 바다여서 동해안처럼 수심이 깊은 바다가 아니지만 그곳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운치가 있다. 무엇보다 호젓한 정취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손주들도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형이 살아있다면 누려야 할 행복을 내가 느낀다는 비감이 언뜻 스쳐간다.

커피를 마신 후 화포 선창가로 내려갔다. 이곳에는 제법 긴 다리가 바다 위로 놓여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다리지만, 다리 위에서 손주들이 겁 없이 다리 밑을 내려다본다.

이 녀석들과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