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삶의 결, 서정적 풍경 속에 스며들다
박장길 시집 「머무는 동안 기억 저편은 풍요로웠다」는 전반적으로 서정성과 현실성이 깊이 배어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집은 자연과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사색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지나온 시간과 현재를 교차시키며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시들은 대체로 노스탤지어, 상실과 회한, 가족과 유년의 기억,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다.
시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정적이면서도 깊은 감수성이 녹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다소 어둡거나 쓸쓸한 정서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따뜻한 회상의 요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특히, 유년 시절의 기억과 부모, 조부모 세대에 대한 그리움이 두드러지며, 삶의 무게와 현실적인 고단함 속에서도 인간적인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정서적 특성은 ‘꿈속의 언어’, ‘장례(長利) 쌀’, ‘그리운 할머니’ 등의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가족과 고향에 대한 정서가 일관되게 흐르는 점이 인상적이다.
감각적인 언어와 상징적 표현
「머무는 동안 기억 저편은 풍요로웠다」에서 사용되는 언어 표현 기법은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사용되며, 은유와 상징이 시 전반에 걸쳐 강하게 배어 있다. 특히 일상적인 사물들이 시인의 독특한 시각을 통해 재해석되며,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이 탁월하다. 예를 들어, ‘내 손주 오는 길’에서는 우체부의 길과 손주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마음이 겹쳐지며, 기다림의 정서가 절절하게 전해진다. 또한, ‘엄마의 기도’에서는 성경책과 기도 소리가 삶의 고단함과 희망을 함께 품고 있는 이미지로 제시되며, 시인의 내면적 신앙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이 드러난다.
리듬과 음률의 측면에서는 내재율을 통해 시의 흐름을 부드럽게 조절한다. 짧은 구절과 행 간의 적절한 여백이 감정의 깊이를 더하고 있으며, 때때로 반복되는 어휘와 구절들이 운율적인 효과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추수 그 허전함에 대하여’에서는 짧고 리드미컬한 구성이 가을의 씁쓸한 정서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어느새’에서는 간결한 표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만든다.
삶과 기억의 조각들을 담아낸 시편들
이처럼 「머무는 동안 기억 저편은 풍요로웠다」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감정과 기억들을 따뜻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선으로 풀어내는 시집이다. 자연과 사람, 기억과 감각이 조화를 이루며, 한 편, 한 편이 독자의 마음속에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의 담담한 어조 속에서도 묵직한 정서와 삶에 대한 통찰이 스며들어 있으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정과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시집 전체를 통해, 우리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철학적 태도와 정서를 함께 공유하게 된다.
다음은 이번 박장길 시집 「머무는 동안 기억 저편은 풍요로웠다」에서 필자가 몇 편을 선정하여, 주제와 메시지, 시의 형식과 구조, 언어의 결로써 시적 표현 기법과 상징, 시인의 세계관으로써의 시대적·개인적 배경, 시 속의 자연관과 인간상, 독자의 울림 측면에서 감
성적·철학적 의미 등을 나름대로 탐찰(探察)해보았다.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고, 유년기의 결핍과 노동의 기억을 담다
새벽마다 나를 찾는 내 안의 음성이 있다 / 환청처럼 번지다 만 외계의 문장들 / 만져질 듯한 감각의 언어들이 줄지어 숨어 있다 // 꿈속, / 혀끝에서 무너져 끙끙 앓던 언어들이 있다 / 낮술에 취한 말처럼 꼬여 비틀거리듯, / 달과 별이 다투다 헝클어진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 // 기억과 상실의 임계점에서 얽혀버린 어제의 말들이 수런대는 곳, / 생시와 꿈속의 언어가 구별되지 않는 곳, / 더 낯선 문장들이 머무는 세상에 발을 디뎌야 한다 // 날 빛까지 떠도는 달을 따라 나이론가방에 / 꼬마 꽈배기 서너 개와 단팥 빵 두 개를 감아 들고 / 지난밤이 둘러놓은 냉기를 몰아내며 / 신음하듯 뱉어내지 못했던 언어들을 찾아 나선다 // 세 살배기 아이의 옹알이만도 못한 글 / 맹물 출렁 이는 종이컵 속 고민 / 이내 불어 터져 하얗게 새어 나간다 // 앉은뱅이책상 위 우메 / 꿈 깬 뒤 쳐다본 천장(天障) / 참! / 깊고 멀다.
_‘꿈속의 언어’ 전문
시 ‘꿈속의 언어’는 꿈과 현실, 기억과 상실, 그리고 언어와 침묵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시의 핵심 메시지는 말과 언어가 명확히 규정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갈망과 좌절, 그리고 내면의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특히, ‘혀끝에서 무너져 끙끙 앓던 언어들’이라는 표현은 시인이 꿈속에서 포착한 언어의 파편들이 현실에서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낮과 밤, 생시와 꿈이라는 대비 속에서 언어는 때때로 숨어버리고, 때로는 뒤엉켜 왜곡되며, 결국, 시인은 그것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시 속에서 전개한다. 마지막 연에서 ‘천장(天障)’을 바라보며 시의 화자는 꿈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인간이 가진 한계를 통감하는 듯하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탐구를 넘어, 존재의 깊이와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를 돌아보게 한다.
운율과 리듬의 측면에서 시는 자유로운 형태를 취하면서도 긴장과 흐름을 효과적으로 조율한다. 반복되는 장면들(‘날빛까지 떠도는 달’, ‘지난밤이 둘러놓은 냉기’, ‘세 살배기 아이의 옹알이만도 못한 글’)은 언어의 미완성 상태를 강조하며,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강렬한 울림을 남긴다. ‘맹물 출렁이는 종이컵 속 고민’과 같은 표현은 언어가 충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희미하게 흩어지는 느낌을 주며, 언어적 갈증과 무력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또한, 시는 자연적 요소(달, 별, 냉기)를 활용해 인간의 내면 풍경과 감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며, 꿈속에서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을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언어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시사한다. 더불어 시 속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존재의 한 형태로 작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꿈속의 언어’는 단순히 언어의 실체를 탐구하는 시를 넘어, 존재와 인식의 본질을 성찰하는 철학적 깊이를 지닌 작품이다.
냉골에 목줄 매고 골방에 든 동안거 / 울상의 유년이 문고리를 당긴다 // 숨어 울던 시절 시들어 / 미간에 들를 때마다 한숨부터 내뱉는 삶의 등식 // 즘말점말 저수지 터져 벼락 물이 덮친 해 / 머슴 둘 새경에 한 섬지기 터전 / 마지기 풀이로 쌀가마니 숫자에 취하셨던 아버지 // 추수 뒤 / 한 줌 입에 대 보지도 못한 쌀알이 거친 논바닥을 굴렀었다 // 장례 쌀 등에 얹은 구부정한 리어카 / 찌부러진 바퀴를 고무신 밑창으로 밀던 꼬마 형제들 // 차멀미에 전봇대 지나가듯 / 겨운 힘 토해내며 고프던 뱃골 // 살 좋은 버덩엔 이팝나무 한 아름인데 // 녹슨 리어카와 구멍난 고무신이/무심히 늙어 버린 유년을 부른다.
_‘장례(長利) 쌀’ 전문
이 시 ‘장례 쌀(장리 쌀의 방언)’은 가난했던 유년기의 기억을 회고하며, 생존을 위한 노동과 가족의 고단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장례 쌀’은 단순한 곡식이 아니라 빚과 노동, 그리고 삶의 무게를 상징한다. 특히, “냉골에 목줄 매고 골방에 든 동안거”라는 표현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 견뎌야 했던 혹독한 현실을 암시하며, 문고리를 당기는 “울상의 유년”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화자를 찾아오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다. 시는 가을 추수의 풍요로움과 정작 그 결실을 누리지 못했던 가족의 모습 사이의 대비를 강조하며, 특히 아버지가 쌀가마니 숫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배경을 묘사함으로써, 노동과 삶의 고단함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운율과 구조 면에서 시는 짧고 강렬한 행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문적 서술과 상징적인 이미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녹슨 리어카와 구멍 난 고무신이 / 무심히 늙어 버린 유년을 부른다”라는 구절은 물질적 궁핍이 단순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버린 순수한 유년기를 회상하게 한다. 또한, “살 좋은 버덩엔 이팝나무 한 아름인데”라는 구절을 통해 자연의 풍요와 인간의 결핍을 대비시키며, 삶의 불공평한 구조를 암시한다. 시어들은 감각적이고 날카롭지만, 과장 없이 담담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차멀미에 전봇대 지나가듯 / 겨운 힘 토해내며 고프던 뱃골”과 같은 표현은 시각적 이미지와 신체적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강렬한 시적 장치이다. 이처럼 ‘장례 쌀’은 유년기의 결핍과 노동의 기억을 통해, 개인적 경험 속에서 시대적 현실과 계층적 문제를 조명하며, 독자에게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따뜻한 기억과 부재의 애틋함,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
섣달 바람 매서운 밤 / 화롯불 위 노릇하게 익어가던 군고구마 / 쪼그려 앉으신 할머니 손끝엔 / 세월이 주름처럼 깊게 스며있었지 // 낡은 장판 위 / 뒤꿈치 헤진 검정 고무신 한 켤레 / 거꾸로 신고 나가 눈 위에 찍어보던 떡살 무늬 작은 발자국 // 뒤꼍엔 / 어깨끈 늘어난 나무지게 하나 / 비틀린 나뭇결 사이로 햇살 퍼지면 할머니 등이 떠올랐어 // 무거운 나날이고 진 채 / 머지고개 넘으시던 뒷모습이 // 따스한 숭늉처럼 할머니 품 언제나 포근했는데 // 이젠 / 그 바람만 남아 / 잠깐씩 불어오다 이내 사라지고.
_‘그리운 할머니’ 전문
‘그리운 할머니’는 유년 시절의 따스한 기억과 함께, 이제는 부재한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섣달 바람과 화롯불, 군고구마의 이미지로 시작하는 시는 시각적·촉각적 감각을 자극하며 독자를 따뜻한 회상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특히, 손끝의 주름이나 낡은 고무신, 떡살 무늬 발자국 같은 섬세한 세부 묘사는 할머니의 삶과 세월의 흔적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이를 통해 단순한 개인의 추억을 넘어, 한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 세대의 인내와 희생을 형상화한다. 시의 구조는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며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을 따라 흐른다. ‘이젠 그 바람만 남아’라는 마무리는 부재의 쓸쓸함을 강조하면서도, 바람이라는 자연적 요소를 통해 기억과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음을 암시한다.
운율과 리듬 면에서도 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짧고 단정한 행들이 차분한 정서를 더욱 부각한다.
반복되는 시각적 이미지와 대조적인 표현(‘무거운 나날’과 ‘따스한 숭늉’, ‘머지고개 넘으시던 뒷모습’과 ‘포근했던 품’)은 기억 속 할머니의 강인함과 따뜻함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나무지게, 검정 고무신과 같은 상징적 사물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한평생 노동을 감내한 존재의 무게를 담아낸다. 이러한 시적 장치들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가족의 사랑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결국, 이 시는 단순한 개인의 할머니가 아닌, 우리는 마음속에 간직한 따스한 존재에 대한 보편적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며, 한 편의 서정적인 추모곡처럼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고개는 동쪽으로 돌리고 / 꽃잎은 서쪽으로 두어 노을빛까지 담아야지 // 창(窓)은 / 솔가지 살짝 가리도록 남쪽으로 둘까? // 찬 이슬 축축한 독백 바람에 실어 보내고 / 동안거 길 걷다 보면 수레의 봄날 다시 오겠지 // 그땐 / 순전히 보라만 피워 낼 거야 // 시오리길 고개 넘어 / 너를 보러 오는 // 나만 알 수 있는 / 발걸음 소리 들을 수 있을 테니.
_‘수레국 Ⅲ’ 전문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하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고개는 동쪽으로 돌리고 / 꽃잎은 서쪽으로 두어 노을빛까지 담아야지’라는 구절에서 자연의 순환과 빛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포착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태도와 삶의 방향성에 대한 함축적인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창(窓)의 방향을 고민하는 장면은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고민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바람을 통해 독백을 실어 보내는 장면은 내면의 사색과 고독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읽힌다. ‘동안거’라는 불교적 개념이 등장하는 점도 흥미로운데, 이 계절적·명상적 시간의 흐름이 ‘수레의 봄날’이라는 미래와 연결되면서 생멸의 순환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암시한다.
시의 형식과 언어의 결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며, 여백을 활용하는 방식이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특히, ‘그땐 / 순전히 보라만 피워 낼 거야’라는 대목에서 색채의 상징성이 두드러지는데, ‘보라’는 신비로움과 영적인 깊이를 상징하면서도, 수레국화의 특징적인 색감을 강조함으로써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과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지막 연에서 ‘시오리길 고개 넘어 / 너를 보러 오는 / 나만 알 수 있는 / 발걸음 소리’라는 구절은 기다림과 교감의 정서를 극적으로 표현하며, 시적 화자의 내면적 울림을 더욱 깊이 있게 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묘사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 혹은 특정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정서적·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이 시는 결국 자연 속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과 내면의 흐름을 탐색하는 한 편의 서정적인 명상이라고 볼 수 있다.
수확, 그 이면의 허전함과 신앙과 삶의 애환
가을비 드센 날 / 홀씨들 떨며 지새우는 밤 // 낫에 베인 상처 아물 새 없이 / 엉겅퀴 껍질 같은 손등 위로 달아 나는 계절 // 구름 비낀 하늘에 / 땀내 뱉어내며 / 그루의 절댓값을 튕겨 보지만 // 알곡 떨군 빈자리 / 저며 오는그 씁쓸함이여.
_‘추수 그 허전함에 대하여’ 전문
이 시는 추수를 주제로 한 작품이지만, 단순한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허전함’이라는 감정을 중심에 둠으로써 수확의 이면을 조명한다. 가을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과 홀씨가 떨며 지새우는 밤의 이미지는 수확의 기쁨보다는 쓸쓸한 분위기를 강조하며, 특히 ‘낫에 베인 상처 아물 틈도 없이’라는 구절은 노동의 고단함과 쉼 없는 자연의 순환을 암시한다. 이러한 묘사는 단순한 농사의 과정이 아니라 삶의 순환 속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상실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곡식을 거둬들이는 순간, 오히려 허전함이 스며드는 아이러니를 통해 시인은 풍요로움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 시는 짧지만 응축된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시어는 일상적인 동시에 시적 긴장감을 품고 있으며, ‘군고구마 껍질 같은 손등’이라는 구체적인 비유를 통해 수확하는 노동자의 삶을 직관적으로 형상화한다. 또한, ‘그루의 절댓값’이라는 수학적 용어를 활용하여 수확 이후 남겨진 논밭의 흔적을 사유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절댓값이 숫자의 크기만을 나타내듯이, 남겨진 ‘그루(베어낸 밑동)’의 존재는 무엇을 잃었는지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이러한 시적 기법은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 철학적인 성찰을 가능하게 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시인은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추수는 곧 결실과 성취의 순간이지만, 시인은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공허함과 씁쓸함을 강조하며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노동의 흔적, 절댓값으로 남겨진 논밭, 씁쓸한 허전함은 단순한 농경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유한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독자에게 깊은 감성 적·철학적 울림을 전하며, 수확의 의미를 단순한 풍요의 관점에서 벗어나 삶의 공허함과 순환의 필연성까지 확장해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무 십자가 가까워질수록 / 만물들의 발자국과 기도는 쪽배에 실리고 / 가난한 삶은 산 밑으로 모였다 // 토담 변소 앞에 놓여 있던 빨간 성경책 / 한 장씩 찢겨나가고 / 잿간에 머물던 기도 제목들은 싸라기눈 되어 쏟아진다 // 문지방 틈새로 빼꼼히 보이는 곳 / 오래된 언덕 지키고 선 낡은 교회 공소 // 어쩌다 한 번 종소리 들리는 날 / 간절한 소망들 가지런히 모아 쥔 엄마의 작은 손 / 통곡하던 기도 소리, 떨리던 입술은 / 묶인 매듭 풀어 달라는 / 한 맺힌 간구(懇求)였다.
_‘엄마의 기도’ 전문
‘엄마의 기도’는 신앙과 삶의 애환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형상화한다. 제목에서 ‘엄마’와 ‘기도’라는 단어가 주는 직관적인 울림은 독자에게 따뜻하면서도 애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의 초반부에서 십자가와 기도 소리, 가난한 삶이 등장하며, 신앙이 삶의 고단함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특히 ‘가난한 삶은 산 밑으로 모였다’라는 구절은 신앙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이는 안식처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도 제목이 ‘싸래기눈 되어 내린다’는 표현은 삶의 무게가 기도로 승화되는 장면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면서도, 신앙적 간절함과 절박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시의 형식은 자유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각 연이 독립적인 이미지와 정서를 형성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가진다. 특히 ‘토담 변소 앞의 빨간 성경책’이나 ‘문지방 틈새로 보이는 천주교회 공소’ 같은 구체적이고 향토적인 이미지들은 시적 공간을 선명하게 구축한다. 이러한 구체적 이미지들은 시의 정서를 더욱 실감 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신앙과 현실이 공존하는 풍경을 시각적으로 그려낸다. 마지막 연에서 기도가 ‘매듭 묶인 일상을 풀어 달라는 한맺힌 간구’로 표현된 부분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압축하는 핵심 구절이다. 이는 단순한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생존과 염원의 몸짓임을 강조하며 독자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는 신앙을 단순한 믿음의 차원을 넘어, 현실적인 고통과 해방을 염원하는 간절한 행위로 묘사한다. 시인이 그리는 자연은 인간의 기도가 스며드는 공간이며, 특히 종소리와 풍경 속에서 흩어지는 엄마의 기도 소리는 시적 감성을 극대화한다. 신앙이 개인의 구원을 넘어 공동체적 차원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섬세하게 탐구하는 동시에, 기도가 단순한 종교적 수행이 아니라 삶과 맞닿아 있는 절박한 염원임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엄마의 기도’는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독자에게 신앙과 삶, 그리고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시적 경험을 제공한다.
기다림과 애틋한 정서,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삶의 변화
수세미 열리고 물봉숭아 피어나면 / 가죽 가방 어깨 메고 우체부 오던 길 / 손주 소식 기다리던 울 할머니 까막눈이셨지 // 때 묻은 편지봉투 손주 글씨에 / 이웃집 영순네로 급히도 가시던 길 // 우체부 자전거 넘어질세라 / 눈덮인 논두렁 쓸어 내던 길 // 누렁이 좋아라 뒤 따라 돌고 / 미루나무 꼭대기 까치 울던 길 // 쇠죽불 연기 그치면 내 손주 오려나 / 매운 눈 훔치며 내다보던 길 // 춘삼월 지나고 개구리 울면 / 바람불이 도랑 건너 들어서겠지.
_‘내 손주 오는 길’ 전문
이 시 ‘내 손주 오는 길’은 손주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과 그 기다림이 스며든 시간과 공간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시의 주제는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일상의 풍경이다.
시 속에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조응하며, 손주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할머니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물봉숭아, 미루나무, 까치, 개구리 같은 자연적 요소들은 시간의 흐름과 기다림의 지속성을 암시하며, 손주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마지막 연에서 “바람불이(횡성 지명) 도랑 건너 들어서겠지”라는 표현은 기다림이 끝나고 손주가 도착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기다림의 덧없음과 시간의 흐름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시의 형식과 구조는 담담하면서도 운율감이 살아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각 연은 손주의 소식과 관련된 기억을 따라가며,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적 배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눈 덮인 논두렁 쓸어 내던 길’이나 ‘쇠죽불 연기 그치면 내 손주 오려나’ 같은 구절은 구체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이미 지로, 독자로 하여금 할머니의 기다림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만든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며, 반복적인 구조 속에서 기다림의 정서가 점층적으로 고조된다.
특히 길이라는 공간적 요소는 손주의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가 오던 길이면서, 동시에 손주가 다시 돌아올 길로 기능한다. 이는 기다림과 재회의 상징적 공간으로 작용하며, 자연의 변화와 함께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또한, 손주의 편지를 받기 위해 까막눈 할머니가 ‘영순네로 급히도 가시던 길’이나 ‘눈 덮인 논두렁 쓸어 내던 길’은 기다림의 절실함을 강조하며, 인간의 따뜻한 정서와 자연의 조화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단순한 향수적 회상이 아니라, 기다림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에 새겨지는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는 작품이다.
섣달 바람 금줄 붙잡고 / 할머니 손에서 컸지 // 생략 불가한 날들 / 기억 뒤편으로 흐려가고 // 틈새 빠져나온 빛 한줄기 따라 / 허물 몇 겹 벗고 보니 // 하마 // 가을이네.
_‘어느새’ 전문
이 시 ‘어느새’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고 흐려지는 기억과 그럼에도 남아 있는 삶의 흔적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첫 연의 “섣달 바람 금줄 붙잡고”라는 표현은 전통적인 정서와 과거의 따뜻한 기억을 환기시키며, ‘할머니 손에서 컸지’라는 구절은 어린 시절의 보호받던 순간을 암시한다. 하지만 두 번째 연에서는 ‘생략 불가한 날들’이 ‘기억 뒤편으로 흐려가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 중요한 순간들조차 시간 앞에서 희미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연에서는 ‘틈새 빠져나온 빛 한줄기 따라’라는 표현이 내면의 성장과 깨달음을 상징하며, ‘허물 몇 겹 벗고 보니’라는 구절은 변화와 성숙을 암시한다.
마지막 연의 ‘하마 가을이네.’라는 짧고 강렬한 마무리는 시간의 빠른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한순간 계절이 바뀌었음을 깨닫는 순간의 놀라움을 담고 있다.
이 시는 간결한 언어와 절제된 표현을 통해, 개인적인 경험이 보편적인 삶의 흐름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형식적으로도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하고 절제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특히 ‘하마’라는 단어는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상징하며, 일상의 흐름 속에서 문득 시간의 변화를 실감하는 순간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시인의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응시하며, 기억과 성장, 그리고 그사이의 틈을 탐구하는 데 있다. 섣달에서 가을로 이어지는 시간의 점프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삶 속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변화와 그로 인한 정서적 울림을 강조한다. 결국, 이 시는 독자들에 게도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며, 순간의 깨달음이 지닌 철학적 의미를 음미하게 만든다.
존재와 감정 탐색,
그리고 그리움과 부재 속의 존재감
보름 이틀 전야 / 멀리서 보는 밤길의 환상 / 검은 모습 다가선 미동 없는 교각 밑 / 비릿한 겨울 때가 덧쌓이고 있다 // 초저녁별 하나 갈풍리 하늘쯤에 취해 떠 있다 / 삭풍 밟는 아스팔트 위 / 바닥에 부딪히는 고요가 까맣게 튀어 오른다 // 문밖에 둔 마음 / 발자국에 얼어붙고 / 낯설게 들려온 겨울 강 외마디 // 쩌러릉 꿍꿍 // 쓸쓸한 달, 추위에 떨다 잠들고 / 언 눈썹 말아 올리며 뜻 모르게 하던 다짐 / 짤막하게 토하던 밤
_‘달의 속내’ 전문
‘달의 속내’는 겨울밤의 정적과 쓸쓸함을 담아내면서도, 달을 통해 인간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비추는 작품이다. 시의 제목에서부터 ‘속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감정의 흐름과 사유의 깊이를 예고한다. 시 속의 달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는 존재로 등장하며, 밤길의 환상과 추위를 견디는 모습 속에서 고독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문밖에 둔 마음’과 ‘발자국에 얼어 붙’는 이미지는 정서적 소외와 단절을 상징하며, 마지막 연의 ‘쓸쓸한 달’과 ‘짤막하게 토하던 밤’은 감정을 억누르다 터트리는 순간의 아릿한 정서를 표현한다.
이러한 점에서 시는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교차시키면서도, 독자들에게 감성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시는 짧은 행과 비약적인 이미지 전개를 통해 파편화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쩌러릉 꿍꿍’이라는 의성어의 활용은 차갑고 건조한 정적을 깨뜨리는 요소로 작용하며, 시적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또한, ‘검은 모습 다가선 미동 없는 교각 밑’, ‘바닥에 부딪히는 고요가 까맣게 튀어 올랐다’ 같은 구절은 색채와 동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공간적 분위기를 강화한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시의 전체적인 서정성을 높이며, 마치 한 편의 몽환적인 영상처럼 독자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도록 한다.
시인은 달과 겨울이라는 자연적 요소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고 있다. 달이 ‘언 눈썹 말아 올리며 뜻 모르게 하던 다짐’이 라는 표현은 모호하지만 깊은 상징성을 지닌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위로하거나 다짐하지만, 그것이 정작 의미가 없을 때의 감정을 나타내는 듯하다. 결국, 이시는 차가운 계절 속에서 외로운 존재로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면서도, 달이라는 보편적 상징을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감성과 철학적 여운을 남긴다.
질척한 고무신이 / 헐렁한 안부를 묻는다 // 무릎 적신 이슬은 한나절 되어 바람이 실어 가고 / 폭염에 데인 삽자루, / 상처 싸매고 그늘에 누웠다 // 대를 잇는 쇄선들 / 보이지 않는 금 그어 지켜낸 한 섬지기 // 아침노을 마냥, / 미어지는 그리움만 번져 간다 // 올 팔월엔 / 이승 나들이 다녀가시겠지 // 서낭당 지나 바람불이 건너 소 몰고 가겠 다는 / 낯선 기별 한번 주시려나 // 스쳐만 가는 바람 자락 안부 한 줄에 / 긴 한숨만 끊어 쉰다
_‘아버지 안부’ 전문
이 시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부재 속의 존재감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첫 연에서 ‘질척한 고무신’과 ‘헐렁한 안부’라는 표현을 통해 아버지의 삶의 흔적과 그리움의 공허함을 대비시키며 시적 긴장을 형성한다. 이어지는 연에서는 자연 속 노동의 흔적(‘폭염에 데인 삽자루’)과 아버지의 희생을 상징하는 이미지(‘대를 잇는 쇄선들’)가 교차하며, 아버지의 삶과 가족을 위한 헌신이 한 섬지기(작은 땅을 일구는 사람)의 역할로 압축된다. ‘미어지는 그리움만 번져 간다’는 구절은 아버지를 향한 애절한 감정을 극대화하며, 독자에게 깊은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올 팔월엔 / 이승 나들이 다녀가시겠지’라는 구절은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암시하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존재감을 유지하는 점에서 독특한 시간성과 정서를 형성한다. 특히 ‘서낭당’과 시인 고향의 지명인 ‘바람불이’ 같은 요소들은 조상의 혼과 자연을 연결하는 상징으로 작용하며,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행위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영적 교감을 향한 갈망임을 시사한다. 마지막 연에서 ‘스쳐만 가는 바람 자락 안부 한줄’은 부재 속에서도 남아 있는 아버지의 흔적을 의미하며, ‘긴 한숨 끊어 쉰다’는 결말은 그리움의 무게를 깊이 있게 마무리한다.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으로 엮으며, 부재한 존재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아버지의 삶과 그리움을 자연의 요소로 녹여냄으로써, 개인적 정서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낸다. 시대적·개인적 배경을 고려할 때, 노동과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전통적 세계관이 깃든 시인의 시선이 돋보인다.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아련하며, 독자에게 철학적 성찰과 감성적 울림을 동시에 수여한다.
물리적, 화학적 개념 차용과 삶의 관조
가벼운 질량들의 타박 / 작용 반작용의 폐해 / 걱정이 억눌린 차가운 감정 // 화학적 운해가 덮이던 시간 / 공원 숲의 달음박질은 속절없다 // 먼 산 이만큼씩 다가와 앉아도 / 어둠의 질서는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 징검다리가 전하던 따스한 온기 / 강물의 파동이 그림자를 흔들고 // 날숨 내뿜는 소모의 영역 어디쯤에 / 동의가 필요치 않은 존재로 머물러 있었을 가치를 두고 / 소요했던 간밤이 겸연쩍다.
_‘탓’ 전문
이 시 ‘탓’은 물리적, 화학적 개념을 빌려 인간의 감정과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가벼운 질량들의 타박’이나 ‘작용 반작용의 폐해’와 같은 표현은 인간이 감정적으로 충돌하고 상처받는 과정을 물리 법칙에 빗대어 설명하며, 감정이 마치 필연적인 힘의 작용처럼 흘러간다는 것을 시사한다. ‘화학적 운해’라는 표현은 오염된 공기처럼 감정을 억누르는 분위기를 연상시키며, ‘공원 숲의 달음박질’이 ‘속절없다’는 구절에서는 자연 속에서 달리지만,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 드러난다. 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교차적으로 묘사하며, 인간의 감정이 외부 세계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먼 산 이만큼씩 다가와 앉아도 / 어둠의 질서는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라는 부분은 자연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반대로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헤매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징검다리와 강물의 이미지가 따뜻함과 흔들림을 동시에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삶의 균형과 불확실성이 공존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마지막 연에서는 ‘소모의 영역’과 ‘동의가 필요치 않은 존재’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자아 탐색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확장된다. 시는 감성적인 이미지와 물리적 개념을 교차적으로 활용하 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억지로는 씻지 않는 갯바위 가슴팍 / 한세월 두었다가 얼음장 녹을 때쯤 / 겨울만 헹궈내고 // 젖은 풀잎 덮어둔 삶의 조각들은 / 오뉴월 바람에 말려 두어야지 // 마모되는 갈망 // 필요도 / 충분도 // 내 안의 욕(慾), // 바위처럼 살아야지 / 바위 되어 살아야지.
_‘바위 되어 살아야지’ 전문
‘바위 되어 살아야지’는 자연 속 바위의 존재 방식을 통해 인간의 삶을 관조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바위의 속성을 비유하여 억지로 씻어내려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헹궈지는 삶의 흐름을 강조한다. 이는 인간이 삶에서 겪는 고난과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 하기보다, 자연의 순환 속에서 서서히 흘려보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임을 시사한다. 특히 ‘한 세월 두었다가 얼음장 녹을 때쯤 / 겨울만 헹궈내고’라는 구절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불필요한 것만 덜어내고, 본질을 지켜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는 현대 사회에서 흔히 강요되는 즉각적인 해결과 감정의 억압과는 대조적인 메시 지를 전달하며, 독자에게 깊은 성찰을 유도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 시는 짧은 행과 단어를 활용하여 단단한 느낌을 자아내며, 여백을 통한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특히 ‘마모되는 갈망’이라는 구절은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며, 바위처럼 욕망을 줄이고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를 강조한다. 또한 ‘필요도 / 충분도’와 같은 간결한 표현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욕망(慾望)이라는 한자어를 강조한 것은 인간 본연의 갈망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시적 표현과 상징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성찰하는 매개체로 기능하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궁극적으로 시인은 바위의 형상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닮아야 할 이상적인 삶의 태도를 제시하며, 이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철학적 의미를 전달한다.
마무리하며
박장길 시집 「머무는 동안 기억 저편은 풍요로웠다」가 전달하는 서정성과 현실성,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든 깊은 감수성을 확인하였다. 시인은 자연과 일상의 순간들을 섬세한 언어로 포착하며, 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특히 유년의 기억, 가족, 상실과 회한, 그리고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는 시집 전반에 흐르며, 독자들에게 따뜻한 회상과 깊은 성찰의 기회가 된다. 시의 언어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 은유와 상징을 활용하여, 평범한 사물 속에서도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끌어낸다. 이를 통해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면서도 삶의 정서를 묵직하게 담아낸다.
박장길 시인은 감각적인 이미지와 리듬감을 활용하여 독특한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짧고 간결한 행들은 여백의 미를 살리면서도 감정의 흐름을 부드럽게 조절하며, 반복되는 구절들은 운율적인 효과를 극대화한다. 특히 자연과 인간의 삶을 연결하는 방식이 두드러지며, 이를 통해 개인적인 기억이 보편적인 정서로 확장된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적 요소들은 단순한 회상의 도구가 아니라, 삶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색의 매개체로 작용한다. 시인은 바람, 달, 나무, 물 등 자연의 요소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비유적으로 풀어내며,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머무는 동안 기억 저편은 풍요로웠다」는 단순한 서정 시집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와 철학이 녹아든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기억과 현실, 상실과 희망을 조화롭게 엮어내며, 그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탐색하는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삶의 무게와 고단함 속에서도 따뜻한 감성과 인간적인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가 시집 전반에 흐르고 있으며, 이는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처럼 박장길의 시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순간들을 붙잡아, 그것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삶의 깊은 면모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감성 노래 박장길 시집, 머무는 동안 기억 저편은 풍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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