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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나도 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

by 해들임 2024. 1. 1.

LG그룹 임원 김석주(필명),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출간 원고 때문이었다.

출간 상담 후 어느 날, 나는 여의도 마천루 파크 원 그의 사무실을 찾아 첫 만남을 하였다. 고층인 그의 사무실에서 여의도를 내려다보았다. 샛강이 흐르는 여의도가 손바닥만, 하였다. 소상공인쯤 되는 우리 출판사와, 대기업의 규모적 차이가 고층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창가에서 건너뜸 영등포를 바라보니, 해드림출판사가 입주한 빌딩이 보였다. 우리 사무실 베란다에서 여의도를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파크원, 오른쪽으로는 63빌딩이 서 있다. 그가 창가에 서고, 내가 베란다로 나가 여의도를 바라보면, 우린 서로 마주하며 서 있는 셈이 된다. 손이라도 흔들면, 보일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가까운 거리다.

 

대기업 임원 정도이면, 권위 의식도 엿보일 수 있고, 카리스마도 느껴질 법한데, 그는 조용하며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미소 또한 잃지 않아, 마주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 성품인 듯싶었다.

그가 처음 출간한 책이 ‘이차전지 성장 이야기와 대기업 오래 다니기’였다. 이 책이 나온 이후 그가 부탁을 해왔다. 혹여 출판사 사무실에 자리 하나 있으면 당분간 좀 쓸 수 없냐는 것이다. 이즈음 그는, 대기업 생활 33년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다음 원고를 쓰기 위해서는, 출판사 사무실이 아무래도 나을 성싶었던 모양이다. 마침 사무실에는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지만, 오랜 세월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소박한 사무실에서 무엇인들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후 근 석 달 가까이 그와, 출판사 네 식구가 함께 지냈다. 그는 우리 사무실로 출근하자마자, 노트북 영상 통화를 통해, 외국 거래처 직원들과 영어로 미팅을 하였다. 우리는 일하면서 영어 히어링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그가 출근할 때면, 항상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직접 구운 크로와상과 커피를 들고 왔다. 우리 여직원들은 아침마다 얼굴이 환해졌다. 크로와상과 커피라는 먹거리보다는, 직접 호텔에 들러 주문을 해오는 정성과 분위기가, 젊은 여직원들의 기분을 고조시켰다. 이를 기회로 잠시 오붓한 티타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니, 평소 별 대화 없이 각자 맡은 일에만 집중하느라, 고요하기만 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확 밝아진 것이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우리 직원을 위해 커피를 사 들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 우리 출판사 사무실에서 그와 함께하는 동안, 때론 예민해져 말다툼을 하곤 하던 부사장과 나는, 얼굴 한 번 붉힌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와 대화를 하면 마음이 편안하였다. 그는 항공 마일리지가 수백만이나 되듯이 외국을 무수히 오가던 삶이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항공 마일리지가 가장 많이 쌓였다고 하였다.

대기업에서 일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마인드와 어찌하면 책 한 권이라도 팔아볼까 발버둥 치는 나와는 삶의 영역이 비교가 될 수 없었지만 내 삶의 영역을 그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의 한 단면으로 소중하게 생각해 주었다. 그러니 서로 어떤 이야기를 해도 쉽게 공감을 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무언가 스토리를 만들어 주변을 기쁘게 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행동 하나 하나는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때론 우리를 여의도 맛집으로 초대하여 회식도 하고, 연말에는 사무실에서 조촐하게 송년회 자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과거 그의 지난하였던 삶의 편린도 들을 수 있었고, 지방대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이 되기까지의 애환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독서하며 공부하는 사람이었고, 쉼 없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자신에게 습관화시켜둔 그런 사람이었다.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왔으면서도, 자신보다는 늘 주변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도와주려는 모습도 보았다.

 

어느덧, 그의 첫 저서 ‘이차전지 성장 이야기와 대기업 오래 다니기’정산 시기가 되었다. 약 4개월 동안 책 판매량을 정리해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정말 뜻밖의 주문을 해왔다. 인세 일부는 자신이 후원하는 고아원에 보내고, 나머지는 우리 직원 보너스로 주라는 것이다. 물론 큰 금액은 아니지만, 우리 직원은 아주 행복해하였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저자가 받은 인세를 출판사 직원의 보너스로 건네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그 신선한 충격이 행복한 스토리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가난한 출판사에서 고생하는 우리 직원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자 하는 격려 뜻이었지 싶다. 저자들이 찾아와 직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일은 자주 있지만, 자신의 인세를 직원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출판 인생 20년에서 처음 경험한 일이었다. 그를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행복한 스토리를 만들어 주는 삶이고 싶다’라는 소망이었다.

 

일년쯤 지나, 그가 두 번째로 출간한 책이 [지방대생 대기업에서 성공하기]이다. 이는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기까지 조직 생활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며 쌓아온 노하우를, 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게 지침이 되기 위해 쓴 책이다. 이미 저자를 어느 정도 알고 읽는 원고였지만, 사회적으로 오를 만큼 오른 위치임에도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하며 살아가는 그를 보았고, 조직에서의 인간관계와 그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단 하루도 일해보지 못한 내게, 대기업의 시스템과 분위가 어떤지도 어느 정도 느끼게 되었다.

 

어느덧 2023년도 기울어 갔다.

한 해가 다 가도록 나는 그에게 안부조차 제대로 묻지 못한 채 지내왔다. 사실 안부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아내가 암 투병 중이기 때문이다. 암으로 고통받던 형을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봤던 나로서는, 현재 그의 가슴이 얼마나 황량하고 외로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자칫 어설픈 위로로 오히려 그를 더 아프게 할지도 몰라 틈나는 대로 기도만 할 뿐이었다.

2023년 마지막을 며칠 앞두고서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직원들과 송년 점심을 같이할 수 있느냐 물어왔다. 우리도 그가 보고 싶었다. 우리 부사장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예약한 식당을 알려와 직원들과 여의도 일식집에서 그를 만났다. 조금은 야윈 듯 보였지만 잘 이겨내고 있는 거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나는 한 번도 직원들을 고급 일식집으로 초대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직원들에게 해주지 못한 일을 그가 해준다. 심연 속 들끓는 아픔을 억누르며, 그는 직원들 앞에서 시종일관 식사 자리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의 두 번째 책 [지방대생 대기업에서 성공하기]를 널리 알려 조금이라도 웃음을 주면 좋으련만, 북한산 인수봉 같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재간이 없다.

미안한 마음을 어깨가 휘도록 짊어진 채 돌아왔다.